말하는 '도학'은 이미 정치적이거나 일상의 행위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분히 심학적인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도덕성의 회복을 위한 마음 수행론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면서 인심도심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인심에 있어서 이기를 논하고 율곡은 태극론을 포함하여 우주론과 인성론의 전체 속에서 이기를 파악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료는 1. 퇴계의 ‘이(理)’와 사단칠정, 성리학의 이(理), 2. 율곡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와 도덕 및 욕망, 3.. 조선의 실학자들이 고민했던 당시 시대의
8년 동안이나 사칠논쟁을 벌이면서도 타인의 인격과 의견을 존중하고 죽기 전 마지막 편지에서도 “고명한 가르침 받아 잘못된 의견을 버리고 새로운 의미와 품격을 얻어 참으로 기쁘다.”고 표현할 정도로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인정하는 성리학자로써 경을 수양한 학자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 인심도심논쟁의 연원
`인심도심`이라는 말은 『서경』 `대우모`에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미하니 정성을 다하고 하나에 집중해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는 구절에서 연원한다. 이것은 자기 내부의 도심과 인심을 뚜렷이 구분하여 오직 도심으로 중심을 잡고 성실히 행하여야 사물에 가장
성리학적인 대의를 지켜 신왕조에 협조 하지 않은 선비들은 자연히 관사(官史)가 될 기회가 없었으므로, 시골에서 글 읽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그것이 성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이전 사림의 모습이었다.
초기 사림파가 『소학(小學)』을 중시했다는 사실이 말해 주
성리학을 신봉하고 성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은 모두 이단시 하고 배척하는 풍토가 있었으나 율곡 이이 선생은 불교나 노자의 근본적이고 순정한 것은 과감하게 수용하여 도교와 불교의 정수한 사상을 가려냄으로써 유교의 입장에서 셋의 합일점을 찾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율곡은 일찍이 삼교합일
Ⅰ. 성리학(주자학)의 형성
조선조의 기틀이 확고해진 15세기의 성리학은 사화의 파란을 헤쳐야 하는 사림들에 의해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15세기의 성리학은 곧 사림정신으로 구현된다. 사림들의 사림정신은 따지고 보면 사육신․생육신이 출현하여 드높였던 절의정신에 접목된 것이지만
성리학은 16세기의 말과 17세기의 초에 성행한 예학(禮學)과 더불어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었다. 주리론과 주기론의 표면적 논쟁은 없었으나 명분과 형식을 더 강조하는 쪽과 실질과 효용을 함께 중시하는 쪽의 대립은 가끔 있었던 일이다. 본래 고전 유학에서의 예는 내면적 인의(仁義)가 외현적으로 표
2) 경제적 상황
경제적으로는 당시 사회현실은 토지제도의 문란과 공물․진상 등 각종 조세제도의 불합리, 세금의 과중한 부과로 인해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져 농촌 경제가 위기를 맞는 시기였다. 먼저 16세기 조선의 경제적 현실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연산군에 의한 악법의 폐단을 지적할 수 있다.